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
내가 아는 한, 곽노현은 이 나라 교육관료의 평균 수준을 훨씬 웃도는 독보적인 교양인이자 도저한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현장 교사로 지낸 내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나는 그의 혁신교육이 잘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서울교육의 수장인 그가 할 수 있는 일 또한 대단히 제한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선출된 권력이었고, 선출권자들의 평균적인 감각을 뛰어넘는 급진적인 단절을 시도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일 터이므로. 나는 다만 그가 전임자 공아무개와 그들의 동아리가 수십년간 어떻게 손을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얽어놓은 성채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고, 한두 군데의 물꼬라도 틔워주기를 기대했을 따름이다. 물론 그마저도 이젠 불가능해지고 말았지만.
대법원의 ‘곽노현 사건’ 판결문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법률가들의 몇몇 해설을 찾아 읽었다. 새삼스러운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경로당에서 10원짜리 고스톱을 치는 마을 할머니들을 찾아가 화투판을 잠시 물리고, 곽노현 사건의 경과를 들려주고 판단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굳이 법관에게 이 사건의 판결을 맡기는 것은 복잡한 법률 서류를 남들보다 빨리 읽고 해석해내는 그들의 역량을 인정하여 시민들이 그들에게 이러한 사법적 권한을 위임해주었기 때문이다. 지난 시절 독재자의 서슬에 사법 살인도 서슴지 않던 그들은 이제 시민들이 선출한 권력마저 극히 정치적인 방식으로 끌어내리는 권력집단이 되어 있다.
대법원의 ‘곽노현 사건’ 판결문에 담겨 있는 ‘고의성’을 나도 한번 이렇게 판단해 보고 싶다. “우리 대법원이 짱이거든! 우리가 12월 대선에 ‘곽노현 심판’까지 세트메뉴로 올릴 거야! 그리고 헌법재판소! 당신들보다는 우리가 더 세거든!” 1심, 2심에서도 유보한 ‘곽노현의 선의의 2억원’에 대한 판단을 법리해석의 위법사항으로 간주하여 으레 하듯 파기환송하지 않고 굳이 그 ‘고의성’을 임의로 판단했듯이, 나도 그렇게 한번 흉내 내본 것이니 부디 시비를 걸지는 마시라.
나는 곽노현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다만 6년 전 내가 삼성의 노동자 탄압 사례들을 적시하는 글을 발표했을 때, 그가 지인을 통해 나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해준 인연이 있다. 예상대로 그 글에 대해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고, 나 자신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과대망상에 시달릴 무렵, 나에게 전해진 그의 격려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지식인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공적 책무를 피해가지 않았던 드문 양심가 곽노현, 그는 좋은 교육행정가로 살고자 했고, 그의 양심이 비상한 시대와 만나 한 알의 밀알로 썩어 묻히게 되었다. 그가 일구어낸 것은 안철수와 박원순으로 대표되는 시민세력의 등장과 같은 정치지형의 변화만이 아니라, 그 시절 나에게 주었던 작은 위로처럼, 이 황망한 시대를 살아가는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 그래도 아직은 인간의 길을 고뇌하고, 양심으로써 번민하는 따뜻한 한 인간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희망의 빛이다. 옥중의 곽노현, 그에게 큰절을 올린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