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족 이야기

잊지 않겠다는 가족의 약속 - 슬픔은 나누는 것

더더좋은날 2015. 4. 21. 21:22

 

어느새 1년이 지나 버렸다.

무엇 하나 밝히지 못했다. 어느 하나 달라진 것 없다. 오히려 진실은 가라앉고 불신은 깊어지고 거짓만 드러났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난 부활절부터 가족들과 함께 광장을 찾았다. 그 즈음 정권은 진상규명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천명했다. 정권은 쓰레기 대통령시행령으로 포문열었다. 급기야 대통령의 조롱이 이어졌다. 기어이 유가족 한명 없는 폐쇄된 분향소에 제멋대로 제단을 펼치고 자기들만의 추모제를 열었다. 문상객이 상주를 몰아낸 꼴이 아니고 뭔가? 힘으로 상주를 자처하며 조롱하는 패륜에 다름 아니다. 패륜의 정점은 그날 밤이었다. 우리 가족도 서울광장을 찾았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빼곡히 들어선 추모객의 물결을 담기에 광장이 비좁았다. 5만이 넘는 추모객은 분노 했지만 평화로웠다. 서울광장에서 분향소가 마련된 광화문까지 지척의 거리였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무거운 발걸음을 차분하게 분향소로 옮겼다. 설마 이 거대한 조문 길을 막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1주기인 오늘 만큼은... 그러나 행진이 시작되기도 전에 광화문 네거리는 경찰의 차벽으로 단절되었고 그로인해 서울광장부터 광화문 사이 길은 이미 차량 한 대 지나지 않은 거리가 되어 있었다. 거리를 점거한 것이 아니라 경찰이 친절하게 만들어 준 차 없는 거리를 그냥 편하게 걸었을 뿐이었다. 설마 유가족이 앞장서고 국화꽃 한 송이씩 손에 들고 헌화하고 돌아가려는 5만이 넘는 시민을 가로막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문은 경찰 차벽에 가로 막혔다. 분노가 끌어 오르지만 추모하는 날 경찰과의 충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일까? 착한 대오는 굳이 광화문 네거리를 고집하지 않고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고양이 한 마리 빠져 나갈 틈도 없는 차벽은 종각을 지나 종로 3가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분향소로 갈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차단된 것이었다. 경찰 버스로 만든 만리장성이 창조된 밤이었다. 이렇게 정권은 진실인양의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우리 아이들 손은 촛불대신 국화꽃 한송이씩 들었다. 그렇게  꼭 쥐어진 국화꽃 한송이들만도 수만개였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막을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돌을 든것도 아니고 화염병을 든것도 아니다. 어떻게 꽃을 든 수만명의 조문객들을 막아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에게 손에든 꽃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무기였고 음패와 조작을 위협하는 무기였나 보다. 내 딸 예슬이에게 도저히 이해 할수 없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다음날 학교도 가야 할 아이들을 추운 거리에 더 둘수가 없어서 집으로 철수 했다. 몰론 헌화를 하기 위해 준비한 국화꽃송이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조문객의 집으로 와야 했다. 국가가 이럴수 는 없는 것이다. 그날 밤은 잠을 뒤척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