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모어로 새로 태어나다. (2016.06. 08)
꼭 6개월 만이다.
'토마스모어' 나의 세례명이며 이 이름은 마흔여덟 인생에 새로 얻은 이름기도 하다.
속 시원하고 감회도 있어 아내와 맥주 한잔 하고 늦은 글을 남긴다.
돌이켜 보면 유물론자임을 감추지 않고 자랑스럽게 들어낸 젊은 시절을 살았다.
나에게 명동성당은 교회이기 전에 민주화의 성지로 기억이 더 남아있는 곳이다.
6월 항쟁, 김영삼 정부 시절 날치기 노동법 투쟁, 명동 성당 들머리에서 밤세 비를 맞으며 지할철 파업을 지키던 친구가 안쓰러워 함께 밤을 지세웠던 기억이 남아있는 곳, 그 곳이 내게 명동성당이었다. 2009년이던가? 노동조합 활동 시절 불법적인 선거 개입과 탄압으로 벼랑끝에 서 있을 때였다. 신자도 아닌 나는 명동성당을 찾았고 '제발 정의가 이기게 해 달라고' 염치 없게도 간절히 기도 했었다. 그 때는 그만큼 절박 했었다. 기도 때문일까? 모진 야합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기적과 같은 승리를 얻었었다. 나에게 명동성당은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민주화의 성지였던 명동성당 들머리는 간데 없고 명동성당은 공사중이다. 공사가 끝 난다 해도 약자들에게 내어줄 자리는 없을것 같아 아쉽다.
이제 추억 같은 명동성당은 과거가 되었고, 나는 예한이로 인해 전혀 다른 이유로 명동성당을 들락였다.
자폐를 앓고 있는 우리 예한이가 세례를 받은 교회도 명동성당이다. 사실 명동성당이 아니면 발달장애인 우리 예한이가 세례를 받을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명동성당 솔봉이를 통해서 예한이는 세례를 받았고 그때 담당 수녀님과 약속 한것이 있었다. "이제 아빠만 남았는데..." 당초 약속에서 1년은 더 걸렸지만 이제는 지방으로 가신 수녀님과의 약속을 지키게 되어 마음의 부담 또한 덜었다.
돌아보면 지난 12월 예비신자 주일반 신청을 결심하기 전까지 수녀님과 약속을 했으면서도 쉽게 시작할 수 없어 망서렸다. 그렇게 망설임이 길어지고 늘어질 무렵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의 움직임이야 말로 무료하게 나딩굴던 마음을 이끌었던것 같다. "교회는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교회는 예배, 교리, 절차, 권위에 매달리기 보다는 거리에서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져야 한다"는 프란치스코 교종님의 신선한 등장 또한 가톨릭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한 것은 사실이다.
6개월, 짧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딱 한번 결석을 하고 물론 그 시간도 보강으로 채웠다.
별 다른 감회 없이 세례를 맞이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세례를 받을 때 울컥하더라.
6개월을 가르쳐 주신 수녀님께서 어머니와 같은 인자한 웃음으로 축하해 주실 때 환하게 화답했지만 순간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눈시울이 붉어져 애써 참았다.
훌륭한 신자,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신자가 될 자신도 없거니와 그런 신자가 되지도 않을것이다.
기도하는데만 충실한 신자가 되기 보다 나이롱 신자라는 말을 들을 지라도 내 속에만 머물지 않고 행동하는데 용기를 가지는 그런 신자가 되기를 내 스스로 바래본다.
길위에 싸우는 신부님처럼 말이다.
이렇게 명동성당은 내게 추억에 이어 또하나의 기억을 심는다.
아니 새로운 시작 점일 수 있는 가능성을 심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하기 따라서....
장경희 루치아, 정예슬 클라라, 정예한 로코 마지막으로 정성훈 토마스모어 이렇게 우리가족은 성가정을 이루었다. 막상 되고 나니 기쁘고 기쁘다.
2012년 6월 23일 정예슬 클라라
2012년 10월 21일 정예한 로코
2014년 6월 8일 나 '토마스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