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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도 원칙도 없는 위기 대응 / 정석구

더더좋은날 2008. 11. 5. 13:02

»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벼랑 끝으로 치닫던 국내 금융시장 불안이 일단 한고비를 넘긴 듯하다. 지난주 한-미 중앙은행 사이 통화 맞교환 합의 이후 시장은 안정세로 돌아섰다. 정부도 한숨 돌렸다고 판단했는지 어제 대대적인 내수 부양을 위한 ‘종합대책’을 내놨다.

경제위기 때 정부가 가능한 정책 수단을 동원해 경기부양에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경기부양을 위해 아무 정책이나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위기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바탕으로 거기에 걸맞은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 눈앞의 위기만 벗어나려는 백화점식 부양책을 쓸 경우, 우선은 상황이 호전될지 모르지만 이는 또다른 위기를 잉태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정부의 위기 대응은 기본 철학과 원칙도 없이 지극히 임기응변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단순히 경기순환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기침체가 아니다. 세계를 엄습하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는 ‘100년 만의 위기’라고 일컬을 정도로 세기적인 현상이다. 그동안 글로벌 스탠더드로 일컬어졌던 미국식 금융자본주의가 격변기를 맞고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도 10년 전 외환위기와 그 성격은 다르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때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우리 경제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으면 상습적인 위기에 빠질 수도 있는 중요한 국면이다.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한 기본 철학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내걸었다. 외환위기를 관치금융의 폐해가 누적된 결과라고 보고, 경제 체제를 시장경제로 탈바꿈시키려 한 것이다. 특히, ‘시장경제’보다 ‘민주주의’를 더 강조했는데, 이는 과거의 정치적 경험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민주주의 없이는 시장경제 발전도 없다”는 김 대통령의 소신에 영향받은 바 크다.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기본철학을 바탕으로 기업·금융·노동·공공 등 4대 부문 개혁과 사회안전망 구축 등을 체계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이 정부에는 경제 틀을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지에 대한 큰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이 위기를 벗어나면 우리 경제가 어떤 모양으로 변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없다. 친기업·감세·규제완화 같은 개별 정책들이 돋보이긴 한다. 하지만 이런 정책들은 미시적인 정책 수단일 뿐이다.

특히, 이번 위기의 중심지였던 금융산업을 어떤 모델로 발전시킬지가 중요하다. 그렇지만 우리 금융산업을 이미 실패한 미국식대로 끌고 갈지, 아니면 일본이나 유럽형으로 전환할지에 대한 논의는 어디에서도 이뤄지지 않는다. 달러 가뭄에 시달리느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달러 차입이 원활해진다고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걱정스런 것은 무차별적인 건설경기 부양이다. 단시간에 가시적인 경기부양 효과를 볼 수 있는 게 건설 쪽이긴 하다. 1~2년 정도는 그 효과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은 자원배분 왜곡, 부동산 투기 재연 등으로 장기적으론 우리 경제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칠 게 뻔하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중에만 반짝 효과를 보면 된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절대 채택해선 안 될 정책이다. 우리 경제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에 대한 큰그림이 없다 보니 이처럼 손쉽고 시대착오적인 대책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한국 경제를 어떤 방향으로 개편할지, 명확한 철학과 원칙을 세워야 한다. 그런 철학과 원칙에 따라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게 순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앞뒤가 완전히 뒤죽박죽된 채 미로를 헤매게 될 것이다. 이미 그런 길로 들어섰는지도 모르겠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twin86@hani.co.kr